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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스토리, 월드비전의 하이라이트를 담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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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북한사업 담당 예리 임 이야기

쉬워도 쉽게 할 수 없는 말들

1954년, 예리의 엄마가 태어난 해. 한반도는 전쟁 직후 온 나라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삼 남매 중 막내이던 엄마가 여섯 살이 될 무렵 할아버지가 떠났고 혼자 세 아이를 키우기 힘에 부쳤던 할머니는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겼다. 선명회합창단(現 월드비전합창단)이 전쟁 고아들로 합창단을 만들기 위해 단원들을 선발하던 것도 이 무렵. 삼남매도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언니와 오빠는 선발 되었지만 합창단원이 되기에는 너무 어렸던 예리 엄마가 문제였다. 하지만 월드비전은 형제가 떨어질 수 없으니 예리 엄마까지 단원으로 선발하자는 결정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일이죠..” 예리는 덤덤하게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월드비전은 한국 전쟁고아 중 노래를 잘하는 아이들을 선정해 선명회합창단(現 월드비전합창단)을 꾸렸다. 선명회합창단은 한국전쟁으로 고통 받는 고아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전해 준 전 세계 후원자들을 찾아가 아름다운 노래로 감사를 전했다. 선명회합창단 단원이던 예리 엄마와 삼촌, 이모가 함께 한 월드 투어 모습.
월드비전은 한국전쟁 고아 중 노래를 잘하는 아이들을 선정해 선명회합창단(現 월드비전합창단)을 꾸렸다. 선명회합창단은 한국전쟁으로 고통 받는 고아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전해 준 전 세계 후원자들을 찾아가 아름다운 노래로 감사를 전했다. 선명회합창단 단원이던 예리 엄마와 삼촌, 이모가 함께 한 월드 투어 모습.

예리 임. 월드비전 북한사업 담당자인 그녀는 이제 막 평양에서 북경으로 건너오는 길이다. 다시 가정이 있는 미국까지 긴 비행을 앞두고 그녀를 북경공항 한 켠에서 만났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평양과 북경의 거리. 어차피 못 가는 곳이라 여겼던 북한을 방금 다녀온 사람이 앞에 있으니 전에 없던 감정이 몰려온다.

예리는 월드비전 북한사업팀 소속으로 식량, 식수, 긴급구호 전반을 담당한다. 한국에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94년 북한지원을 시작한 민간 단체 중 하나인 월드비전은 말 그대로 사부작사부작 조용히 북한 지원을 계속해 오고 있다. 2006년 월드비전 북한사업팀에 입사한 예리도 그 잔잔하고 뚝심 있는 걸음을 걷는 중이다.

“입사하고 1년에 3, 4번은 북한에 갔어요. 2008년에는 미국 정부에서 진행하는 북한식량배급사업을 맡아 평양에서 10개월 정도 살았고요. 북한은 제게 먼 나라가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가깝죠.”

예리는 열 살에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갔다. 동양인이 많은 곳에서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동부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니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인종에 따라 달라지는 백인들의 태도를 경험한 예리는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국인은 어떤 의미일까?” 호기심은 한국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고, 그 가운데 당연히 한국전쟁과 북한이 있었다. 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엄마가 살았는지 알게 된 후, 예리는 지금 북한의 어려운 상황에 마음이 쏠렸다.

“전쟁 중에 태어난 우리 엄마는요 생일을 몰라요. 이모도 모르고요. 외삼촌만 생일을 알아서 지금도 외삼촌 생일에 몰아서 축하를 해요. 세 분은 선명회 합창단을 2~3년 동안 하며 월드투어를 다니셨대요. 월드투어 이후에도 선명회 합창단에 함께 있으며 좋은 대학교까지 나오셨죠. 엄마는 약사, 이모는 간호사, 삼촌은 지휘자를 하세요. 고아였지만 학비 걱정 하나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월드비전 지원 덕분이었고요. 고아가 이렇게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게 월드비전 참……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대단하다? 고맙다? 이 마음을 다 담을 수가 없네요.”

한국과 북한을 공부할수록 예리는 북한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굳게 자리잡았다. 그렇게 강한 긍휼과 사랑으로 뛰어든 북한사업. 예리의 마음은 언제나 처음 그대로이다.

“북한에 가면요. 그냥 한국 사람이에요. 한 번은 북한에 있는 식량을 지원하는 유치원에 가서 한 여자 아이를 만났는데 우리 언니 어렸을 때랑 너무 똑같은 거예요. 마음이 찢어지더라고요. 아, 이건 정말 잘못되었다. 어른들의 문제로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구나. 또, 엄마가 되어 보니 아이들에 대한 아픔이 더 강하게 느껴져요. 내 아이가 배가 고파서, 마실 물이 없어서 울고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북한 아이들에게 제공 될 국수가 만들어 지고 있는 공장. 국수는 유통기한이 3일 정도 밖에 안되어서 아이들에게 빨리빨리 먹이고 있다. 즉, 다른 용도로 저장하여 사용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북한 아이들에게 제공될 국수가 만들어 지고 있는 공장. 국수는 유통기한이 3일 정도 밖에 안되어서 아이들에게 빨리빨리 먹이고 있다. 즉, 다른 용도로 저장하여 사용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수를 먹기 어려운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침개가 제공된다
국수를 먹기 어려운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침개가 제공된다
월드비전이 지원하는 밀가루가 잘 배급되고 있는 지 모니터링 차 예리와 함께 북한을 방문한 월드비전 북한사업 담당자 랜달
월드비전이 지원하는 밀가루가 잘 배급되고 있는 지 모니터링 차 예리와 함께 북한을 방문한 월드비전 북한사업 담당자 랜달
밀가루 출고 기록장. 나가고 들어온 내역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밀가루 출고 기록장. 나가고 들어온 내역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랜만에 방문한 북한에서 예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순박한 북한 주민들을 만났다. 정부 관계자 앞에서 인터뷰를 할 때는 잔뜩 긴장을 했다가도 자신들과 비슷하게 생긴 예리를 보면 뽀얀 미소를 보여주곤 했다. 월드비전이 밀가루를 주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먹지 못해 많이 아팠을 텐데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방문하는 곳마다 빠짐없이 들었다. 예리는 행복했고 고마웠다. 또, 미안했다. ‘더 도와야 할 텐데.. 더 손을 잡아줘야 하는데..’

이제 서로의 나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자칫 오해나 문제의 소지가 생길 까봐 지면에 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체크했다. 이렇게 말로 하면 쉬운 데 차마 그러지 못한 이야기들을 언제쯤 우리는 웃으며 나눌 수 있을까? 왠지 서로 착잡해 지던 순간, 우리는 후원자를 기억했다. “예리. 우리 후원자님에게 인사할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예리의 목소리가 약간 상기된다.

“후원자님, 북한을 잊지 않고 또 끊임없이 후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북한사업에는 많은 굴곡이 있었지만 여러분의 지지와 기도 덕분에 이렇게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북한 아이들을 위해 정말 위대한 변화를 만들고 계세요.”

빅허그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 예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북한의 아이들을 별 생각 없이 외면해 온 것이 부끄럽다. 굴곡 많은 북한 사업만큼이나 굽이진 삶의 고비를 당당하게 넘은 예리의 엄마와 씩씩하게 자라 북한을 끌어안고 묵묵히 나아가는 예리가 참 멋지다. 참 고맙고.

글. 윤지영 후원동행2팀
사진. 국제월드비전, 윤지영 후원동행2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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